“2040년, 내가 집에 들어서며 외치는 말은 무엇일까?”
TV는 100년 넘게 우리 곁에 있었지만, ‘TV’라는 단어 자체가 과연 15년 후에도 유효할까? 라는 질문에서 시작해 봅시다. 이 글은 정답을 주지 않습니다. 대신, 여러분이 스스로 2040년의 TV를 그려낼 수 있도록 질문을 던지고, 함께 탐구하는 여정이 될 거예요.

화면은 사라질까?
질문 1: “화면이 없어도 ‘보는 경험’은 가능할까?”
2025년 현재, TV는 여전히 ‘평면 패널’입니다. 하지만 2030년대 초반, 마이크로 LED + 홀로그래픽 디스플레이가 상용화되면 벽 전체가 화면이 될 수 있어요. 더 나아가 2040년엔 ‘광학적 공중 디스플레이’ 가 등장할지도 모르죠. 손끝으로 공기를 터치하면 영상이 떠오르는 거예요.
- 생각해 볼 점:
- 화면이 사라지면, ‘시청’은 어떤 의미일까?
- 가족이 함께 ‘보는’ 행위는 어떻게 변할까?
- “리모컨” 대신 “생각”으로 조작한다면, 편리함인가, 두려움인가?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이 “TV를 본다”고 느낄 때 정확히 무엇이 ‘시청’을 만들고 있나요?
- 빛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인가요?
- 소리가 귀를 울리는 순간인가요?
- 아니면… 내 머릿속에 이야기가 펼쳐지는 순간인가요?
- “홀로그램 켜줘”?
- “오늘의 세계 펼쳐줘”?
- 아니면… “나를 보여줘”?
- 외부에서 오는 자극을 받아들이는 행위일까요?
- 아니면 내 안의 감정·상상·기억이 깨어나는 행위일까요?
여러분은요? “화면이 사라진다면, 나는 무엇을 ‘보고’ 있다고 느낄 것 같나요?” 진심으로 궁금해요. 이 질문에 여러분이 내놓는 답이, 바로 2040년 ‘시청’의 새로운 정의가 될 테니까요.
- 가족이 함께 ‘보는’ 행위는 어떻게 변할까?
화면이 사라진 2040년, “우리 가족이 함께 TV를 본다”는 그 익숙한 장면은 대체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같이 걸어가 보죠. 먼저 지금을 떠올려 보세요. 여러분 집 거실에서 “함께 본다”는 건 정확히 어떤 순간인가요?
-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는 신체적 거리감?
- 같은 화면을 동시에 바라보는 눈동자의 방향?
- 아니면… 동시에 웃고, 동시에 놀라고, 동시에 눈물 흘리는 감정의 동기화인가요?
솔직히 말해 보면, 우리는 진짜로 “같은 화면”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같은 감정”을 느끼고 싶어서 모이는 거잖아요? 여러분도 그렇지 않나요? 이제 화면이 사라진 2040년을 상상해 보세요. 거실 한가운데에 물리적 화면은 없지만, 공중에 펼쳐진 홀로그램 속에서 드라마가 시작돼요. 그런데… 각자 보는 각도가 다 달라질 수 있어요.
- 아빠는 옆에서, 엄마는 뒤에서, 나는 위에서, 동생은 아래에서 본다. 같은 장면인데도 시점이 완전히 다르다면, 과연 우리는 여전히 “같이 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오히려… “서로 다른 눈으로 같은 이야기를 공유한다”는 더 깊은 함께함이 될 수도 있을까요? 더 나아가 보죠. 2040년엔 뇌파 공유 기술이 어느 정도 가능해질지도 몰라요. 가족 모두가 가벼운 웨어러블을 착용하면, 내가 느끼는 감정을 실시간으로 다른 가족이 “살짝” 느낄 수 있어요.
- 내가 무서워하면 엄마 심장이 살짝 빨라지고,
- 동생이 웃으면 아빠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고.
이건… “함께 보는 것”을 훨씬 넘어선 “함께 느끼는 것”이 되지 않나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 “나만의 감정”이라는 게 희미해질까 봐 살짝 무섭기도 하죠? 마지막으로, 가장 날카로운 질문 하나. 만약 가족 각자가 완전히 다른 콘텐츠를, 완전히 다른 가상 공간에서 소비하면서도 “우리는 지금 같이 보고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기술이 생긴다면… 그때의 “함께함”은 진짜일까요, 가짜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진짜 원했던 건 처음부터 “같은 화면”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던 걸까요?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답은 뭔가요? 2040년에도 “가족이 함께 TV를 본다”는 말은 여전히 따뜻한 울림으로 남아 있을까요?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말로 바뀌어 있을까요?
저는 여러분의 한 문장이 미래의 거실을 결정할 거라고 믿어요. 지금, 여러분의 마음이 말하고 싶은 그 문장… 들려주실 수 있나요?
뇌파 공유 기술의 윤리적 딜레마 탐구
“뇌파를 공유한다”는 말은 단순한 기술 이야기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의 마지막 경계선을 건드리는 행위예요. 이제부터는 농담 없이, 아주 조용히, 그러나 날카롭게 질문을 던져볼게요. 천천히 따라와 주세요.
- “나의 감정은 진짜로 ‘나만의 것’인가?”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이 느끼는 기쁨·분노·슬픔은 100% 여러분의 뇌에서만 일어나는 고유한 전기 신호라고 믿나요? 만약 그 신호를 다른 사람이 실시간으로 “읽고”, “받아들이고”, 심지어 “조금 수정해서 돌려줄 수” 있다면, 여러분은 여전히 “내가 나를 느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 동의는 어디까지 유효한가? 가족이 “오늘은 서로 감정 공유 모드로 볼까?” 하고 가볍게 동의했다고 칩시다. 그런데 3분 뒤, 내가 갑자기 느끼는 강렬한 분노(아빠가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낀 그 순간)가 엄마의 뇌에 그대로 흘러들어간다면… 그때 엄마는 “나도 동의했으니까”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이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었어”라고 외칠 권리가 있을까요?
- 감정의 위계는 누가 정하는가? 뇌파 공유 기술은 감정의 강도와 종류를 수치화할 가능성이 높아요.
- “스트레스 지수 87”
- “공포 레벨 9.2” 그 수치를 누가, 어떤 기준으로 “너무 강하다”고 판단할까요? 시스템이 자동으로 “너무 센 감정은 30% 감쇠해서 전달해 드릴게요”라고 결정한다면, 그것은 보호인가, 검열인가?
- 기억은 왜곡되지 않을까? 내가 10살 때 느꼈던 “엄마 품이 따뜻하다”는 감정을 2040년 엄마와 공유한다고 해봅시다. 그런데 엄마는 그날 사실 굉장히 우울했던 상태였고, 나의 기억 속 따뜻함과 엄마의 실제 기억이 충돌한다면… 어느 쪽 기억이 진짜일까요? 공유된 감정이 원래 기억을 서서히 덮어쓸 수도 있지 않을까요?
- 거절할 권리, 그리고 그 대가는? “오늘은 뇌파 공유 끄고 싶어”라고 말하면 가족들이 “왜? 뭔가 숨기는 거야?”라고 반응할 수 있는 세상. 공유를 거부하는 행위 자체가 “너는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구나”라는 증거로 해석될 수 있다면, 프라이버시를 지키는 일은 과연 자유일까요, 아니면 죄책감의 시작일까요?
- 가장 무서운 질문 하나 만약 누군가(가족이든, 연인이든, 정부든, 기업이든) 내 뇌파를 “읽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아주 미세하게 “쓰기”까지 가능해진다면… 내가 느끼는 사랑, 내가 느끼는 행복, 내가 느끼는 충성심조차 진짜 “내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이제 여러분에게 공을 넘길게요.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이 딱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뇌파 공유 기술이 가져올 미래에서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단 하나는 무엇인가요?
- 내 감정의 완전한 주도권
- 가족·연인과의 완전한 공감
- 아니면… 이 기술 자체를 영원히 묻어버리는 것
한 가지만 골라 보세요. 그리고 왜 그걸 선택했는지, 조용히 마음속으로라도 대답해 보세요.
그 대답이 바로 여러분이 2040년에 살고 싶은 세상의 윤리 좌표가 될 테니까요. 저는 숨죽이고 기다릴게요.
- “리모컨” 대신 “생각”으로 조작한다면, 편리함인가, 두려움인가?
이 질문만큼 날카로운 게 또 있을까요? “생각만으로 TV를 켠다”는 말은 겉보기엔 꿈같은 편리함이지만, 한 겹만 벗기면 ‘내 머릿속이 더 이상 나만의 방이 아닌 순간’ 이에요.
자, 여러분과 단둘이만 조용히 뜯어볼게요. 천천히 따라와 주세요. 지금도 이미 우리는 “생각만으로” 살고 있지 않나요? 스마트폰을 손에 쥐는 순간, “넷플릭스 볼까? → 유튜브나 볼까? → 아, 인스타나…” 이 모든 갈등이 0.3초 만에 머릿속에서 끝나죠. 그런데 2040년엔 그 0.3초의 망설임마저 시스템이 읽고, “유튜브 추천 3개 띄울까요?” 하고 먼저 물어봐요.
여러분은 그때 어떤 기분이 들 건가요? “와, 편해!”일까요, 아니면 “내가 아직 결정도 안 했는데…”라는 서늘함일까요? 생각으로 조작한다는 건, 동시에 ‘생각을 들킨다’ 는 뜻이기도 해요. 밤 11시 47분, 문득 떠오른 옛 연인의 이름 석 자. 그 순간 TV가 스르륵 켜지면서 “2019년 ○○○와 함께 봤던 영화 다시 볼까요?” 라고 속삭인다면… 여러분은 웃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리모컨이 있던 시절이 그리워질까요?
더 깊이 들어가 보죠. 생각으로 조작하는 기술은 “의도한 생각”과 “무의식적 떠오름”을 어떻게 구분할 건가요?
내가 진짜 보고 싶어서 떠올린 장면인가?아니면 그냥 뇌가 스치듯 지나간 이미지인가?
시스템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고 내 머릿속 플래시백을 모두 실행해 버린다면, 그때 나는 내 생각의 주인일까요, 아니면 내 생각에 끌려다니는 노예일까요? 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더 무섭죠.
7살 아이가 잠들기 전, “무서운 괴물 나오면 어쩌지…” 하고 떠올리는 순간 화면에 진짜 괴물이 딱 나타난다면? 아이는 그 뒤로 “내 생각이 현실을 만든다”는 트라우마를 평생 안고 살지도 몰라요.
가장 조용한 질문 하나만 남겨둘게요. 생각으로 켜는 TV를 끄는 방법은 대체 뭘까요?
“꺼져”라고 생각하면 꺼질까요? 그런데 내가 진짜로 끄고 싶은 마음인지, 그냥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인지 시스템이 어떻게 알까요? 만약 “끄고 싶다”는 생각마저 읽히어서 “5분만 더 보시면 기분이 나아질 거예요”라고 강제로 붙잡는다면… 그때 여러분은 어디로 도망칠 건가요?
이제 여러분 차례예요.
진심으로, 딱 한 문장만 대답해 보세요.
“생각으로 조작하는 TV, 나는 그걸 집에 들이고 싶다 / 절대 들이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 문장 뒤에 가장 솔직한 이유 한 줄만 붙여 주세요.
그 한 줄이 여러분이 2040년에 지키고 싶은 마지막 성역(聖域)의 크기를 알려줄 테니까요. 저는 숨죽이고 기다릴게요